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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고 2

당근치로 2024. 3. 23.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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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기억하고 싶은 문장과 읽으며 떠오른 생각들

road
출처: 나. 어느 날 걷던 길

 
복기할 때마다 생각한다. 관객수는 우리가 섣불리 예측할 수도, 장담할 수도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개봉 후엔 무슨 수를 써도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촬영장에서 힘껏 내 몫을 해내는 것뿐임을.
→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되, 내가 후회할 일이 없게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삶을 올바로 지탱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을 오래 들여야 쌓이고 깨우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초반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초조함에 짓눌리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빨리 성과를 내고 싶다. 요행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내 몸과 삶에 나쁜 것은, 내 작품에도 좋지 않다. 끊임없이 작업하고 이를 통해 인간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한 걸음씩 진보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걷기를 통해 내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결과에 휘둘리지 않고 꾸준히 작업해 나가는 것이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탈도, 치기도 없는 약간은 재미없는 삶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몰라도, 나의 이런 하루가 나는 마음에 든다. 지금 여기서 동이 터올 때까지 매일 축배를 들기엔 아직 나는 갈 길이 한참 먼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먹는 걸 좋아하는 내가 걷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체중이 150킬로그램은 족히 넘었을 것 같다. 나는 다음 생에도 많이 먹고 많이 걷는 쪽을 택하겠다. 세상의 이 무수한 맛있는 음식들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더 많이 먹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 열심히 걸을 테다.
 
걷기는 많이 먹어도 지나치게 살이 찌지 않게 몸을 관리 해주는 동시에 음식을 맛있게 먹기에 딱 좋은 공복 상태를 만들어준다. 열심히 걸은 뒤에 먹는 밥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열심히 걸어야 하고 열심히 걷는 사람은 잘 먹게 될지니, 걷기와 먹기는 환상의 짝꿍이다. 잘 먹고 열심히 걷는 것만으로 숙면할 수 있다.
 
하와이에서 나는 걷고 먹고 웃는 일에 하루를 다 쓴다. 삶의 곳곳에 놓인 맛있고 즐거운 일들을 잘 느끼는 일. 그게 곧 행복이 아닐까.
 
나는 집밥을 요리해 먹는 걸 좋아한다. 내겐 삶의 에너지를 얻는 데 걷기만큼이나 먹기도 중요하다. 내 두 다리를 움직여 얻는 데 걷기만큼이나 먹기도 중요하다. 내 두 다리를 움직여 걸은 만큼, 내 손을 움직여서 끼니를 직접 만드는 과정도 소중하다. 내가 먹을 음식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보고 혀로 맛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리가 좋은 건 이번 한 끼를 애매하게 실패했다 해도, 반드시 만회할 다음 끼니가 돌아온다는 거다.
 
걷기만큼 쉬운 일이 또 있을까? 길은 어디에나 있으니 그냥 두 발을 땅에 딛고 양다리를 번갈아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건강해지고 기분까지 좋아지는, 내가 아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 아주 기본적이지만, 아주 하기 힘들지만, 꼭 해내야 하는 것. 건강한 루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집안에만 머물고 싶은 날, 집밖이 왠지 낯설고 오직 내 방만이 안전하게 느껴지는 날 아침이면 나는 생각을 멈추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무거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렇게 자신을 설득해 보는 것은 어떨까? 너무 오래 누워 있으면 허리와 머리가 아프니 침대에서 살짝만 일어나 보자고.
 
땅에 한 발을 내딛는다. 그저 한 다리를 뻗고 심호흡을 해본 것뿐인데, 나는 어느새 몇 시간째 걷는 중이다. 일단 내가 밖으로 나가 한 발을 내딛기만 하면, 땅이 자연스럽게 내 몸을 받치고 밀어준다. 오늘 아침, 나는 정말 몸이 천근만근이고 마음이 울적했던 게 맞을까? 지금 이렇게 가뿐하게 걷고 있지 않나.
 
'아침에 운동하면 건강해지고 하루를 성실하게 시작할 수 있으니 그만 일어나자! 넌 할 수 있어!'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지친 내 몸을 소외시키고 다그치는 이런 얘기는 피로한 나에게 먹히지 않는다. 그보다는 단순한 행동과 결심이 훨씬 더 힘이 세다. 일단 몸을 일으키는 것. 다리를 뻗어 한 발만 내디뎌보는 것. 이러한 행동들이 매일같이 이어져 습관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일어나 걸을 수 있다. 몸에 익은 습관을 불필요한 생각의 단계를 줄여준다. 우리는 때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갇혀서 시간만 허비한 채 정작 어떤 일도 실행하지 못한다. 하지만 걷기가 습관이 되면 굳이 고민하지 않고 결심하지 않아도 몸이 절로 움직인다. 내 컨디션이 좋고 여러 조건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을 때 비로소 걷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내가 정말 바닥을 기는 최악의 상황이 왔을 때도 관성처럼, 습관처럼 걷기 위해 나는 오늘도 걷는다.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온갖 고민과 핑계가 나를 주저앉히는 힘보다 내 몸이 앞으로 가고자 하는 힘이 더 강하다.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몸을 움직이지 않는 방식으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아, 힘들다...... 걸어야겠다.' 나는 힘들수록 주저앉거나 눕기보다는 일단 일어나려 애쓴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팔과 다리를 힘차게 흔들면서 온몸에 먼지처럼 달라붙은 귀찮음을 탁탁 털어내 본다. 그렇게 걷다 보면 녹슬어서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에 윤기가 돈다.
→ 무기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일단 걸어보자.
 
내 몸과 마음이 나에게 '전환'과 '쉼'을 요구하는 사인이 있을 때, 규칙적인 루틴을 정해놓고 내 몸과 일정을 거기에 맞추는 편이 좋다.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루틴이란 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얼마나 골치 아픈 사건이 일어났든 간에 일단 무조건 따르고 보는 것이다. 고민과 번뇌가 눈덩이처럼 커지기 전에 묶어두는 동아줄 같은 것이다. 루틴의 힘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질 때, 우선 행동하게 하는 데 있다. 내 삶에 결정적인 문제가 닥친 때일수록 생각의 덩치를 키우지 말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인생에는 내가 굳이 휘젓지 말고 가만 두고 봐야 할 문제가 80퍼센트 이상인지도 모른다. 문제에 질질 끌려가기보다 그저 걸었다. 생각이 똑같은 길을 맴돌 때는 두 다리로 직접 걸어 나가는 것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죽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에겐 아직 최소한의 걸을 만한 힘 정도는 남아 있다. 걷기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자리에서 더 버티고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준다.
"힘들다, 걸어야겠다."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라면서 왜 많은 분야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일을 경험해보려고 하면 일단 잘되긴 글렀다고 의심부터 하고 보는 걸까? 한 사람 안에 잠재된 여러 가지 능력을 일생에 걸쳐 끄집어내고 활짝 피어나게 하는 것이 인생의 과제이자 의무라고 본다. 그런 과정이 결국 나를 완성해 주는 것이라 믿는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능력' 덕분에 여러 직업을 한 번의 생에 동시에 살아가는 축복도 누리는 것일 테니까.
→ 많은 실패가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결의 생각이다.
 
자신감을 가지는 것과 자신을 확신하는 상태는 전혀 다른 문제다. 자신감이란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열심히 한 일을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힘이다. 그러나 사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막연한 느낌이나 주관에 치우치지 않도록 나 자신을 계속 점검한다. 누군가와 생각이 다를 때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현재 나의 기분이나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시간을 쌓아가는 것뿐이다. 어쩌면 확신은 나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오만과 교만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안은 내가 한 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데서 나오지만, 나는 이미 한번 다 치러본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지를 받아들고 망연자실했던 시간은 지나갔다. 이제 문제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영화감독의 일에 임해야 하는가일 뿐이다.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각자가 겪을 슬럼프의 시기와 양상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우리 모두에게 슬럼프는 언제든 찾아온다. 슬럼프란 불운한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떨어지는 재앙이 아니라, 해가나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인생의 또다른 측면일 뿐이다. 슬럼프란 선생님은 평생에 걸쳐 계속 나를 찾아올 것이고 나를 겸허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나는 때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한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모른 채 힘든 시간을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을 노력이라 착각하진 않는지 가늠해본다.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노력이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님을 깨닫는 순간들을 수없이 맞게 될 것이다.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은 순간에도, 틀림없이 그 최선을 아주 작아지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몸을 움직인 만큼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걷기'처럼, 작품과 작업도 결코 '야료'를 부리지 않는다.
 
노력이 온전히 결과에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다. 너무도 보잘것없는 나라는 사람.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의 노력이란 지극히 일부이고 또 결정적이진 않다는 것이 나는 더이상 놀랍지 않다. 가끔은 어떤 결과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 성과이고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나의 미약한 힘이 미치는 범위란 형편없이 좁다는 것을.
 
돌아보고 싶었고, 겸허해지고 싶었고, 솔직해지고 싶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나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었다. 그저 촬영장에서 하루하루 행복하다고 느끼는 일, 몰입의 기쁨을 느끼는 일이 더 절실했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 나 또한 최근에서야 깨달은 진리.
 
인생이란 어쩌면 누구나 겪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서 누가 얼마만큼 빨리 벗어나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사고를 당하고 아픔을 겪고 상처받고 슬퍼한다.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지경에 빠진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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